Park Seo-Bo
CV
박서보, 「전면성」의 대현인(大賢人)

피에르 레스타니

지금 우리는 1994년을 맞이하고 있으며 이는 때마침 박서보가 그의 회화생활 40년을 경축할 수 있는 해이기도 하다. 바로 이에 즈음하여 나는 각별히 그에 대해 품고 있는 존경과 관심의 표시를 그에게 바치는 바이다. 실제로 나는 1986년과 1988년 사이에 서울올림픽에 즈음한 각종 미술행사의 준비를 위하여 자주 서울에 들렸고 그리하여 한국에서의 여러 가지 전시회를 볼 기회를 가진 바 있다. 그리고 마침내는 제43회 베니스 비엔날레의 전시실을 찾아볼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박서보의 작품이 한국 현대미술사에서 차지하고 있는 결정적인 중요성을 내가 가늠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때의 일이다. 박서보의 모든 회화작품은 공간 · 시간 · 마티에르의 통합이라는 이념에 바탕을 두고 있거니와 그 통합은 직접적이자 즉각적인 방식으로 작가와 세계와의 관계, 다시 말해서 작가 자신이 세계와 타인(他人)의 세계와의 관계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 「전면성(全面性)」(올오버)의 충만함은 미국의 액션-페인팅에 있어서처럼 회화 공간에 있어서의 자유분방하고 자율적인 행위의 산물이 아니며, 만일 그렇다고 한다면 그것은 문학 영역에 있어서의 자동기술법의 작위적(作爲的) 서정주의의 순박하고도 단순한 회화 영역에로의 전위(傳位)에 불과하다. 잭슨 폴록의 「드리핑」이 바로 그 몸짓에 의한 자동기술법과 결부되어 있다. 박서보의 경우는 이와는 전혀 다르다. 그의 작품의 회화적 근조는 연필 또는 화필 터치의 축적의 산물이며 그 축적이 모노크롬 화면에 생기를 부여하는 연동적 지속성을 규정짓고 있는 것이다.

약 10년 전까지만 해도 기본적인 터치에 의한 작업은 화면 공간에 있어서의 시간의 지속적 유출이라는 방향에서 이루어져 왔다. 작품의 발상 자체가 그러했고 또한 오로지 그러한 방향에서 제작되기도 했다. 박서보의 커다란 공적은 아마도 공간의 통합이라는 정의(定義)에다 모노크롬 회화의 정신적이자 동시에 시간적인 개념을 접목시킨 데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 한국작가의 모노크롬 회화는 이브 클라인의 그것과는 다르며 이는 그 본질에 있어서가 아니라 그 목적에 있어 다른 것이다.

박서보의 회화에 있어 모노크롬의 도입은 공간-시간적 통합이라는 요청을 반영하고 있는 것이거니와, 바로 그것이 그의 작품으로 하여금 이른바 통합의 유기적 동일성을 지니게 하고 있는 것이다. 색채의 단일성은 작품의 내재적 일관성을 보장한다. 작품의 시간성은 종말을 고했고, 내재적 진행 끝에 작품은 하나의 항구적 현존에로 통하고 있다. 박서보의 작품은 현재도 미래도 갖고 있지 않으며, 하이테크적(的)존재물과도 같이 바로 거기에 내재적 현존성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이브 클라인의 모노크롬 제안은 「현존」의 차원에 도달하고 있으나, 그것은 우주적 허(虛)의 충만된 에너지에 다다르기 위해서이다. 청색 모노크롬 회화는 하나의 움직이는 본질이다. 이에 비해 박서보의 모노크롬 세계는 시간의 정지(停止)에 따르고 있으며 그것이 필경은 그 시간으로 하여금 그 자체로서의 하나의 목적, 「전체」에 있어서의 자율적인 한 일부로써 스스로를 들어내게 하고 있다. 그 일부는「전체」로서의 일부이며 그것이 이 한국 화가에게 있어서는 「보편성」이라고 하는 절대적 위계(位階)와 동화되고 있는 것이다.

박서보의 회화로 하여금 격조 높은 품위를 지니게 하고 있는 것이 바로 이점이며 이는 회화적 통일성이라는 작가적 행보(行步)에 있어 좀처럼 버금가는 경우를 찾아 볼 수 없는 일이다. 약 10년 이래, 연필-화필에 의한 화면 바탕의 필 촉은 그 성향과 정신을 달리하고 있다. 의도적으로 단일화된 지속성 속에 삽입되는 대신 이제 그 필촉은 화면 전체를 커버하면서 대각적이고 우발적인 방식으로 화면에 기입되는 것이다. 작업의 속도는 그만큼 빨라지며 그 속도는 작가로 하여금 화면 조정에 있어서의 단면화를 마지못하게 하고 있다. 따라서 제작의 지속성은 더 이상 필요 없게 되거니와 작가는 작품 형성과정에 있어 또 다른 작품 제작을 위해 작업을 중단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제작이라고 했을 때, 그것은 한지작업일 수도 있고 또는 그가 금세 시작한 작업에 대한 숙고(熟考)일 수도 있다. 실제로 근작에 있어 공간-시간적 종합은 제작 과정에 있어서의 서로 다른 부위(部位)의 결합과 동시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화면의 각 부분은 「전체」의 유기적 당일성에 이르기 위해 또 다른 부분과 합류하게 된다. 바로 이때 나타나는 것이 행위의 리듬이라는 개념이며 그 리듬은 회화 방정식(方程式)의 촉매 또는 수학적 판별식의 구실을 한다. 이 리듬의 개념은 오직 작품 제작과정을 통해서만 의식적인 방식으로 지각된다. 그 개념은 작품의 완성과 함께 살아지며 바로 그 소멸이 「전체」의 유기적 단일성의 표식인 것이다. 박서보의 최근 작업에 있어서는 놀라운 기교의 표시보다도 더 많은 것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이작가의 작가의식이 보다 높은 수준에 상응하는 뛰어난 작업과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때로는 지속적인 한지 콜라주에 의해 표시되고 있는 다양한 요소들의 접합에 있어 재검증되고 있는 것은 곧 본질적으로 미니멀적인 비전의 정신 그 자체이다. 작업과 삶의 체험은 박서보로 하여금 현인(賢人)이 되게 하고 있다. 그는 인간존재의 기본적인 충동이 전체적 혼합물로 기우는 그 어떤 영역에의 귀속도 거역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하여 그는 화면의 구획, 단면화에 의한 기본 행위의 우발성(偶發性)을 전적으로 도맡는다. 그리고 마침내는 그처럼 정착된 에너지가 서로 상반되는 충돌을 극복하고 전체의 리듬에 합류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종합(진테제)의 비밀스럽고도 이렇다 말할 수 없는 순간이거니와 이는 곧 화학 작품이 끝나는 순간, 자율적인 작품이 전체의 내재성(內在性)과 결합되는 순간에 있어서의 시(詩)의 기적이라 할만한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이브 클라인이 제시한 의미에서의 연금술을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시 말해서 창조적 불길의 내적(內的) 변증법이 자취를 감추는 시기, 그리고 회화가 곧 공간, 즉 공간 넓이의 활동적 지각(知覺)에 있어서의 열기가 되는 시기와 때를 같이 하는 청색모노크롬 혁명이 절정에 달했을 때에 제시한 의미에서이다. 그리고 박서보의 선적(繕的) 및 우둘두들한 화면을 바라보면서 느끼는 것이 바로 이 깊고도 본질적인 메시지이다. 나는 거기에서 중국의 명상의 돌과 주술적 효과를 얼마간 느끼게 되며 더 나아가 마음과 정신의 평화를 또한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 나에게 있어 한 가지 사실만은 확실하다. 즉 박서보가 「전면성」의 대현인으로써 20세기 미술사 속에 자리 잡게 될 것이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이 한국 화가는 잭슨폴록과 이브 클라인 사이에 있어서의 하나의 독창적인 미니멀적 종합(진테제)을 발견해 낼 수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일 역)

1994. 4.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