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NG PURUME
홍푸르메
평론
홍푸르메와 〈섭섭한 치유〉 : 원형을 향한 진화 〈섭섭한 치유〉에 이르기까지..

문태영, 아메리칸 이미지 저널리스트, 고신대 교수

홍푸르메의 섭섭한 치유( 攝한 治癒, Healing through Sacred Belief)에는 위트가 있다.  은 '섬길 섭'으로 심복한다는 의미이고, 攝은 '당길 섭'으로 굳건히 지킨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섭섭( 攝)은 하나님을 마음으로부터 완전히 섬겨서 그 믿음을 굳건히 유지한다는 의미를 갖는다. 결국 〈섭섭한 치유〉는 하나님을 굳건히 믿고 섬겨서 병들거나 왜곡된 또는 비정상인 것을 바로 잡는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말로 섭섭하다는 것은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든다. 하나님을 섭섭하고 세상에 섭섭한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면 작가가 이 전시에서 의도하는 바에 접근될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홍푸르메의 <일상의 치유〉연작에 대해 평을 쓴 바 있다. 그의 최근 수년간의 작품과 전시들을 연작으로 규정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2000년 이후로 발표한 작품과 전시들 즉, 섭리(攝理, Providence), 모반(母盤, Motherly Matrix), 일상속의 치유(日常속의 治癒, Healing in Daily Life), 빛이 열려(Opening His Light) 그리고 이번 섭섭한 치유에 이르기까지 〈일상의 치유〉라는 주제는 일관되게 추구되어 왔고, 모티브적인 수준을 넘어 그의 표현의지로 발전되었기 때문이다.

역동성과 상징성에 의한 치유

표현의지를 화두적으로 오래 유지하다보면 자칫 진부해지거나 매너리즘에 물들 수 있으나, 그의 연작을 평하기에 지루하지 않은 것은 작품이 진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많은 전작(前作)들은 발묵(潑墨)과 선염(渲染) 속에서 원경으로 아득히 나타나는 십자가를 통하여 표현의지가 아이콘으로 상징화되는 과정이었다. 이번에도 〈모반〉 계열의 작품들에서는 유사한 경향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번 작품들에서는 특히 발묵과 파묵의 적절한 운용이 기운생동의 역동성으로 평면을 장악하면서 단순성과 함축성으로 주도하고 있다. 그 역동성은 운필의 벡터(vector)적인 방향성과 농묵의 구체적인 하중으로 화폭에 input으로 가해지고, 그 가운데 자리잡은 상징성은 정적이며 무의식적인 결과인 output으로 표출된다. 그 역동성과 상징성 사이의 힘값 차이가 결국 자유로운 시공성으로 남겨진다. 그런데 이번 〈가라사대〉 계열의 작품들에서는 치유를 은유하는 뚜렷한 아이콘을 보이지 않는다. 대신에 화면 전체를 아이콘화 시켜 무의식적 각인을 통한 치유적 효과를 강하게 추구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수묵의 역동성으로 시작하여 치유적 상징성으로 마무리된다.
〈주연(主然)〉 계열의 작품들은 역동성과 상징성을 극히 자제하면서 자연의 원형을 추구하고 있다. 그런데 자연은 전통적인 노장사상에서 무위로서 원형으로 도달하는 게이트로 남아있지만, 오히려 현대에서는 이미 너무 와버린 인간의 세상이 유위가 되어 무위를 보호해야 할 입장이 되었다. 유위를 통한 무위의 깨달음은 곧 자연을 고향으로 즉 모반으로 인식하는 과정이며 결국 하나님의 창조하신 원형적 자연 즉 주연(主然)으로의 귀향이다. 〈모반〉 계열 작품에서 자궁 속의 안락함 같은 고향에 대한 상상력은 〈가라사대〉 계열에서 귀향을 위한 방향을 잡고 〈주연〉 계열의 작품에서 인간과 자연이 어우러진 즉 유위를 통한 무위의 원형을 제시하며 마무리된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출애굽기 15:6)

〈섭섭한 치유〉의 모티브인 〈일상의 치유〉는 기독교적 주제이다. 기독교적 특성은 거듭 나는데 있다. 즉, 포기하고 선택해야 하는 것이 분명하고, 또 구속당하므로 자유로워지는 그 순간에 옳지 않은 것과 병든 것이 치유되어 원래 순백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런 유형의 주제를 택하는 것은 작가가 작품의 세상과 생활의 세상을 분리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식별가능한 스타일을 이루었다. 그래서 수묵화의 매력이 정신, 선과 여백, 먹의 농담, 평면의 긴장과 여유에 있다면, 홍푸르메의 〈섭섭한 치유〉 연작은 수묵화의 매력을 십분 느끼게 한다. 특히 현대를 사는 한국화 작가들이 간과한 동시대성에 대한 실험과 원형에 대한 추구는 쉽게 찾을 수 없는 것이어서 더욱 그렇다. 그의 치유적 사명이 주의 말씀과 함께 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