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issho

<가라앉는 몸을 되돌리기> 

이민훈 


1. 

회화작가이자 타투이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오시영은 신체적 외상과 콤플렉스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필터로 상정하고, 수집된 기억들을 조합하여 회화 과정에 적용한다. 그는 첫 개인전 《invisible yaku》(2020)에서 타투의 도상들, 피부와 살갗이 혼재된 일련의 회화를 통해 이미지를 수용하는 것과 생산하는 것을 사적인 신체성과 연결 지어 이미지와 권력 관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 바 있다. 

이후 1년 만에 본 그의 작업들은 여전히 위의 것과 같지만 어딘지 ‘못 그린 그림’이 되어있었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10점 내외의 회화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조화와 통일감 없는 원색적 안료가 난잡하게, 또 너무 덕지덕지 얹어져 있고, 맥락의 유사성을 찾을 수 없는 도상들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그것들은 재현에 있어서 틀리게, 혹은 표현에 있어서 조악하게 그려져 있다. 비어 있거나, 미 완료이거나, 비례와 형태가 틀린 것이다. 이 못 그린 그림은 리얼리티를 보여주기에는 다른 곳에 가 있거나 뭉개져 있고, 모더니티를 보여주기에는 형식적 고민과 공정이 납작해 보인다. 


2. 

그렇다고 그가 삶과 예술을 가볍거나 얕은 방식으로 대하는 사람은 절대 아니다. 오히려 근래의 90년 대생 회화 작가 중에서는 보기 드물 정도로 진지하고 때로는 너무 겁이 많은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오시영의 작업실을 방문하면 항상 펼쳐져 있는 것들이 있다. 그것은 미술사나, 매체론, 이론서, 화집이 아닌 불교, 기독교와 같은 여러 문화권의 종교 서적과 본인의 과거 사진첩들이다. 여기서 과거 사진은 자신의 유년기가 포함된 가족사진으로 오시영이 사고로 다리의 장애(흉터)를 얻은 특정 사건 이전 시점의 것이다. 그는 아파트 옥상에서의 추락과 장애에 대해 그다지 소극적이지도, 적극적이지도 않게, 덤덤하게 이야기한다. 다리의 장애와 색약을 가지고 있는 그가 그에 관해 이야기하는 방식은 자신의 상처인 듯 끌어낼 때도, 지나치게 타인의 일인 듯 서술하여 헷갈리게 할 때도 있다. 장애에 대해 주체화와 타자화 그 중간 어디쯤으로 대하는 그 태도는 그의 작업에 주요한 징후로 나타날지 여전히 불분명하다. 그가 마주한 죽음의 경계는 정체성이 확립될 시기, 수차례의 절개와 봉합으로 그의 다리를 ‘다른 것’으로 바꾸어 놓았고, 사회성을 획득해야 할 시기, 그를 또래들로부터 떼어내어 색감이 부족한 새하얀 병실에 오랜 기간 고립시켰다. 지금까지 여전히 사회와의 소통에 있어서 장애는 그를 발목 잡고, 또 그의 앞을 가리고 이따금씩 내부로 추락시키고 있다. 


3. 

한편 관습적으로 오시영의 외모는 위압적이다. 그의 몸에는 올드스쿨, 뉴스쿨, 재패니즈 이레즈미, 치카노, 라인워크, 드로잉, 레터링 등 장르를 가리지 않는 수많은 타투 도상이 여백 없이 뒤엉켜 있다. 심지어 그것들은 목을 타고 그의 얼굴과 두피까지 올라온다. 언젠가 그와 함께 종로에서 평창동으로 버스를 타고 움직인 날이 있었다. 노약자석에 앉은 그에게 많은 시선들이 달라붙었다. 그 시선들이 그의 ‘다른 것’에 달라붙는다면 너무나 쉽게 설명되고 납득시킬 수 있으리라. 그러나 시선들은 형형색색의 타투 도상들을 결코 넘어설 수도, 넘어서지도 않는다. 

알 권리를 잘 못 배운 지금의 우리는 주변을 대상화하고, 그들이 우리에게 간결하고 명확하게 또 논리적으로 납득시켜주어야만 마땅한 것으로 여긴다. 그 이해의 과정에서 외부와 내막은 일치하여야만 한다. 이를테면 “관상은 과학이다.”처럼 말이다. 그리고 언제나 보호의 대상이 되려면 무력한 약자이거나, 순결한 피해자여야만 할 것이다. 날카롭고 단단하기보다는 부드럽거나 깨지기 쉬워야 하며, 화려한 다색조이기보다는 모노톤이어야 한다. 장애를 가진 사람이 감히 이런 겉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어딘가 뒤틀린 것일 테다.

작가 스스로는 타투이스트라는 직업적 정체성과 자신의 작업 사이의 연관성을 인지하고 있지 않지만, 이번 전시에서 그 관계를 가릴 수는 없었다. 글을 쓰는 나 또한 몸에 적지 않은 타투가 있다. 적어도 한국에서 타투를 갖고 생활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공감할만한 일이 있다. 주로 타인과의 첫 만남에서 마주하는 질문과 대화인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뭘 그린 거예요?”, “왜 그린 거예요?”, “무슨 의미예요?”, “안 지워지는 거예요? 후회 안 해요?”, “부모님한테 안 혼났어요?” 

이 같은 질문들은 대부분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된다. 질문자에게 별다른 의도나 목적이 있지는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례하지 않은 질문이 되지는 않는다. 경험상 다양한 유형의 대답을 내놓더라도 결국 나에 대한 손쉬운 재단과 편견만이 남은 채 대화가 끝나거나 한다. 이 대화가 꼭 불쾌하지는 않지만, 결코 유쾌하지도 않다. 

이러한 타투에 관한 질문에 대해 오시영은 “오히려 타투가 나처럼 많아 버리면 사람들이 아예 질문조차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이미지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해석의 여지와 가능성이라는 빈틈을 제공해야만 비로소 질문을 받기 시작한다. 다양한 도상들은 지식과 경험의 맥락으로 감각되고, 분류와 분석을 통해 결과가 구축될 수 있는 빈틈이 생길 때 질문이 가능하다고 여겨진다. 

어쨌든 오시영은 이미 사회로부터의 무례한 질문에 대처하는 나름의 대안을 몸으로 체화하고 있었다. 그것은 외부와 내부를 일치시키지 않고 뒤트는 것, 맥락의 일치를 제거하여 판단과 해석을 불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질문에 응하기 시작하면 할수록 더욱더 난처해지고 해결 불가능한 결과에 도달한다는 것을 이미 오래전부터 감각하고 있던 그는 질문과 해명의 기회를 스스로 제거하였다. 그의 외모가 가지고 있는 사회적 서사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렇다고 그것들이 구체적이거나 그대로 일치하지는 않는다. 이 원리는 오시영의 회화에도 적용되어 있다. 공간 속에서 특정 인물이 특정 동물과 함께 있다. 기호로 작용하는 이 구성의 조합은 사건이나 상황을 재현한 것 같지만 사실은 구체적 서사를 갖고 있지 않다. 단지 관람자에게 이야기를 기대하게 하며 ‘분위기’를 만들 뿐이다. 


4. 

그럼에도 위와 같은 ‘무례한 질문’을 들고 다시 그의 작업으로 돌아와 보자. 이번 전시 《흙이 물속으로 가라앉는다》는 무엇을, 왜 그린 것일까? 또 무슨 의미가 있을까? 오시영의 회화들은 거칠고 가볍게 발려있는 표면에 비해, 나름 무겁고 진지한 종교적, 철학적 사유를 함의하고 있다. 전시 제목인 ‘흙이 물속으로 가라앉는다’는 티베트 불교에서 사람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현상을 표현한 세 가지 문장 중 하나이다. 그 세 가지 표현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신체의 압박감이 ‘흙이 물속으로 가라앉는다’라고 표현하는 것. 둘째, 몸이 마치 물속에 잠기듯이 신체의 끈적끈적하고 차가운 느낌은 점차 뜨거운 열의 느낌으로 녹아드는데, 이것을 ‘물이 불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표현한 것. 셋째, 몸이 원자들로 날아가 버리는 듯한 느낌을 ‘불이 공기 속으로 가라앉는다’고 표현하는 것이다.  티베트 불교의 언어를 빌려와, 혹은 그것에 의지해 그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구태의연하게도 ‘죽음’에 대한 어떤 감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죽음의 과정을 감각케 하는 공통적인 표현은 ‘가라앉는다’이다. 오시영을 죽음의 경계로 이끈, 그리고 평생의 장애를 안긴 ‘중력’이 전시의 제목으로 떨어진 것만 같다. 화면은 가볍고 테두리는 무겁다. 

오시영은 이번 회화에 유독 젯소칠도 되지 않은 얇은 린넨을 고집한다. 코팅도 제대로 되지 않은 마 위에 안료와 미디엄이 얇게 발리거나, 비어있거나, 탈각되어있다. 색감은 강렬하지만 다양하게 섞이지 않은 단독적인 것으로 중량을 줄이고 있다. 그 물성뿐 아니라 재현된 이미지 역시 대상들이 공간 속을 부유한다. 배경처리를 보면 대부분 두 가지 톤으로 지면과 공기를 나누고 있어 구체적인 공간을 설정하지 않는다. 이 공간은 미묘한 이질감을 주는데, 공간 속 인물들의 발과 지면의 접촉면을 보면 공중에 떠있는 것 같기도, 땅에 붙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대상의 공간감적 위치가 분간되지 않는다. 이는 중력으로부터의 거리감을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오시영의 머뭇거리는 태도가 반영된 것이다. 그의 다리에 흉터를 남긴 중력은 그에게 죽음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딛지 않을 수 없는 지지대이기도 하다. 지지체로써 그리고 재현으로써 가벼운 화면을 만든 그는 중력의 균형을 화면 테두리 밖까지 상정하였다. 화면 안에서 제외시킨 무게는 직접 제작한 금속 프레임으로 옮겨갔다. 금속의 테두리에는 견고하고 뾰족한 뿔이 달려있거나, 바늘과 가시가 돋쳐 있고, 그 단단하고 날카로운 전류와 화염이 화면 주위를 보호하고 있다. 그가 만들어낸 중력의 균형은 죽음으로부터의 적정거리를 유지시킨다. 


5. 

화면 속 인물들은 모두 그의 어릴 적 가족사진 속 주인공으로 오시영 자신이거나, 그의 누나,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이다. 그들은 신선의 옷을 입고 삼위일체의 구도로 서 있거나, 빛이 쏟아지는 하늘 위에 전능하게 떠있기도 하며, 산봉우리에 앉아서 속세를 관망하고 있다. 여러 문화권의 종교들과 오래된 기억이 혼재되어있는 이 초현실주의적 화면은 신화의 한 사건을 포착한 종교화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것에서 파생된 삽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오시영은 이에 대해 저승과 이승, 중간계의 풍경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화면에 그려진 인물들은 오랫동안 들여다볼수록 성별과 연령대가 모호하게 느껴진다. 새들과 배치된 세 명의 어린아이들은 소년이라고 생각했지만 소녀이고, 하늘에 떠 있는 소녀의 모습은 성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산에 올라앉은 여성은 관점에 따라 성별을 확신할 수 없어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관점에 따라 모호한 인물의 정체성은 재현된 상황을 더욱 신화적으로 만든다. 그저 평범했던 가족 구성원은 영적인 존재로 탈바꿈되었고, 함께 자리하고 있는 동물들은 인간을 저승으로 안내하는 사자(死者)가 된다. 

그런데 죽음의 감각을 표현한 이 회화에서 인물들은 오히려 죽음을 ‘회피’ 하듯이 동물의 시선과 행동 방향의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고 있다. 그 회피는 적극적이고 명확하지 않으며, 몸은 반대로 돌렸지만, 고개는 동물을 향한다거나, 동물과 시선은 반대로 하지만 신체는 접촉하고 있거나, 신체는 떨어져 있지만 방향은 아직 완전히 틀지 못하여, 죽음에 대한 회피를 머뭇거리고 있다. 


6. 

“이 타투는 안 지워지는 거예요?”, “후회하지 않으세요?”는 두 가지 질문인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의 질문이고, 가장 무례하게 다가오는 질문이다. 그 이유는 질문의 기저에 깔린 전제 때문이다. 비약을 조금 해보자면, 그것은 질문자가 이 타투의 도상이 지금은 맞고 미래에는 틀리다는 것을 확신한다는 것이다. 질문자에게는 상대방이 타투를 통해 훼손한 신체를 후회할 것이라는 확신이 있다. 타투의 공정은 안료를 표면 위에 바르는 것이 아닌 신체를 훼손시키고 흉터를 남기는 방법으로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즉 이것은 ‘뒤가 없는’ 이미지이기 때문에 충분한 사유와 방법론의 습득을 통해 결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질문은 이미 불가능한 ‘되돌리기’를 가능하냐고 묻는 것이며, 이미지 생산자가 구축해 온 근간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이다. 이 경우의 되돌리기는 타임라인에서 과거로 이동하는 것이고, 이미지 생산의 공정과정과 사유체계를 회화적 방법론 습득 이전으로 돌릴 수 있느냐는 것이다. 

어쨌든 이 질문을 오시영의 작업에 던지면 그 답은 ‘이미 되돌리고 있다’ 이다. 글의 시작에 나는 오시영의 그림을 ‘못 그린 그림’이라고 말했다. 정교하게 섞지 않은 원색적인 물감의 색감, 사실적 묘사와는 거리가 먼 거친 붓질과 빈틈, 형태와 비례의 미숙함. 이미 제도권 미술 교육을 오랜 기간 받으며 관습적이고 아카데믹한 조형적 역량을 잘 터득한 그가 이와 같은 되돌리기를 보여주는 것이 단지 전략적인 시도만은 아니다. 여기에도 역시 그의 신체적 장애가 닿아있다. 앞에서 언급했듯 오시영은 색약이라는 시각적 질환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타인보다 색을 감각하는 민감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이제껏 그는 색을 인지하는 능력이 보편적 기준에 비해 부족하다는, 인지할 수 없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감을 수반한 상태로 이미지를 대하고 있었다. 그것은 단지 색을 인지하는 감각이 다소 부족하다는 것을 넘어서 그가 식별할 수 없는 형상, 텍스트, 맥락, 사회적 합의가 결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그가 처음부터 보편적 세상과는 다른 시공간에서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오시영이 인체를 보이는 대로 그리면 잿빛과 녹색계열의 탁한 색조의 기이한 형상이 나타나기도 하고, 특정 색을 띠는 풍경과 기물을 그리면 어딘가 디테일과 형태가 일그러지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래서 오시영은 어린 시절부터 세상을 보는 자신의 눈을 신뢰하지 않고, 형상마다 공식을 세워 계산하고 암기하는 자신만의 엄격한 방법론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 시각적 결함을 인정하고 그동안 구축한 자신의 방법론을 되돌리고 있다. 다시 말해 그는 불완전한 시각체계와 불완전한 신체의 물리적 행동 조건을 작업의 정체성으로 내세우고 그것을 회화 공정에 적용하였다. 자신의 시각을 신뢰하고 식별 가능한 색과 형상에 집중하기로 한다. 연약한 신체를 통해 그려진 회화는 오히려 거칠고 강렬한 원색의 색감이다. 그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것은 애써 보지 않으려 한다. 

그의 신체와 내면이 부드럽고 연약할수록 작업의 화면과 도상 그리고 프레임은 더욱더 화려하고 단단하게 직조된다. 


7. 

오시영의 이번 전시와 작품들은 결국 안과 밖이 일치하지 않거나, 애매하게 머뭇거리거나, 추락하고 있는 조악한 죽음의 풍경을 보여준다. 그러나 내용과 형식이 그의 신체적 조건과 맞닿았을 때, 해석의 확장 가능성을 보여준다. 

외상을 가진 몸을 경유하여 만들어낸 회화는 신화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고어물의 죽은 시체덩어리 같기도 하다. 오시영의 회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죽음도 중력도 아닌 결국은 개인의 육체이다. 흉터와 장애가 깃든 자신의 육체를 정체성으로 내세우는 것은 단지 죽음과 절망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 ‘살아남기’와 ‘올바르게 살기’에 대한 질문이기도 할 것이다. 

그의 작업실에 펼쳐져 있던 산문집에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거처에서 죽음의 그림자를 철저하게 막아내려 한다. 그러나 죽음을 끌어안지 않는 삶은 없기에, 죽음을 막다 보면 결과적으로 삶까지도 막아버린다. 죽음을 견디지 못하는 곳에는 죽음만 남는다. 사람들이 좋은 소금을 산답시고, 우리 고향 마을의 표현을 빌리자면, ‘죽은 소금’을 고르게 되는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이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