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hee Jang
장인희
평론
시간의 항해술: 우발적이고 이질적인 순간들이 구성한 시간의 새로운 차원

안진국(미술비평) / Lev AAN(Art Critic)

하루의 계획은 늘 어긋난다. 밀어닥치는 시간은 확정적인 의미 속에 집어넣지 못한다. 과거는 정박할 수 없는 순간들을 남기며 확정될 수 없는 미래와 겹쳐진다. 우리는 산산이 깨진 순간이라는 시간의 파편들을 다시 엮어 시간을 구성하지만, 간혹 규정할 수 없음에도 규정되었다고 믿는 명료한 착란으로 인해 신기루에 불과한 시간의 항로를 따라간다. 그러나 시간의 항해는 하나의 사건일 뿐. 상황이라는 복합적인 요인에 의해 그 항로는 수시로 변한다. 그래서 시간의 항해는 수많은 가능성과 우연성의 파도를 가르며 앞으로 나아가는 순간의 우발적인 운동일 뿐이다.
장인희는 끊임없이 밀려오는 순간의 물결을 가르며 항해하는 작가다. 그는 생성과 변화가 끊이지 않는 시간을 숫자로 만들어 시곗바늘 아래 새겨 넣지 않는다. 명료한 착란에 빠져 허상에 불과한 규정된 시간의 항로를 따라가지도 않는다. 그는 그물처럼 엮인 여러 관계망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시간을 쫓는다.

‘살아 있는’ 시간: 분화(分化), 흩어짐, 재구성
장인희 작업의 핵심은 시간이다. 그의 작품이 지닌 화려함 때문에 자칫 시각적 조형성에 무게 중심을 둔 형식주의 작업이라고 오해할 수도 있으나, 그의 작업은 형식이 아니라 시간에 방점이 있다. 하지만 그가 탐색하는 시간은 단순하지 않다. 그는 생성되고, 변하고, 움직이는, 고정되지 않은 ‘살아 있는’ 시간을 사유한다.
시간은 과거를 지나 현재를 거쳐 미래로 나아가는 단일한 구조의 선형적 형태로만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이런 직선적인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 부른다.) 원의 구조를 지닌 아이온(aion)이라는 초월적 시간도 있고, 하나의 사건, 하나의 점이 모든 시간을 응축하고 있는 카이로스(kairos)의 시간도 있다. 그리고 우리의 경험 속에는 기계적인 크로노스의 시간보다는 아이온의 시간과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장인희의 시간은 어디에 닿아 있는가? 작가는 시간을 분화된 우발적이고 이질적인 순간들을 재조직하는 하나의 사건으로 바라본다. 이것은 혼종적으로 맞물려 있는 초월적 시간인 아이온의 시간과 사건에 집중하는 카이로스의 시간이 동시에 공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다만 작가는 결정적 순간에만 집중하는 것(카이로스의 시간)이 아니라, 모든 순간을 대상으로 시간을 조직하기 때문에 그의 시간은 아이온의 특성이 더 짙게 배어 있다.
작가는 사건으로서 시간을 구축하기 위해 순간들을 재구성하여 시각화한다. 이 작업은 가위로 얇고 평평한 반사 필름을 오리는 행위로부터 시작하는데, 오리는 행위에는 실질적인 ‘시간의 육화(肉化)’와 상징적인 ‘시간의 분화(分化)’가 중첩되어 있다. 가위질은 오리는 행위의 시간 경과(비물질적 시간)가 고스란히 오려진 형상(물질적 형태)으로 전환되는 과정이다(시간의 육화). 또한, 작가에게 오리는 행위는 환영 같은 과거와 환상 같은 미래 사이에 존재하는 실체인 현재 시간을 분화하여 ‘순간’을 생성하는 상징적인 몸짓이다(시간의 분화). 그의 가위질은 손의 압력과 가위의 각도 및 속도, 시시각각 떠오르는 형상에 영향을 받아 순간순간 차이를 보인다. 이러한 차이는 재료의 상태나 주변 환경뿐만 아니라, 신체적•정신적 상황, 경험으로 습득한 기술적 숙련도, 행위를 통해 파생되는 기억의 파편들 등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서로 얽혀 있는 심층적인 조건들과 맞닿아 있다. 이로 인해 오려진 형상은 다층적인 관계망을 내재한, 우발적이고 이질적인 순간을 의미하는 하나의 상징적인 기호가 된다.
무의식에 가까운 작가의 가위질은 순간순간의 감각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데, 먼저 실험적이고 역동적인 형상을 오리고, 이후 남은 부분은 그 제한된 조건 안에서 더는 오릴 수 없을 때까지 계속 실행된다. 이렇게 생성된 형상들은 오려진 시기와 관계없이 그 크기와 재료에 따라 분류•보관되며, 시간의 시각화를 위해 생성 순서와 상관없이 무작위로 선택하여 재배열한다. 이렇게 순간들은 흩어졌다가 각기 다른 순간들과 함께 모이기를 반복하며 시간이 사건이 되도록 조율되고 초월적 시간이 도래하도록 조형된다. 그리고 작가의 손길에 의해 재조직된 순간의 형상들은 옵티컬 아트(optical art)처럼 시각적 착시를 불러 일으켜 마치 시간이 생명력 있게 꿈틀거리는 듯한 유동적 리듬을 만들어낸다.
또한, 작가는 여러 겹의 아크릴판을 겹치고 각각의 레이어에 입자들을 조직적으로 구성하여 마치 무중력 상태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거나 빛을 흡수하는 검은색인 반타블랙3.0(Vantablack3.0)을 배경에 칠하여 우주의 깊이를 품은 듯한 착시를 주는 방식 등을 더함으로써 초월적 시간의 깊이를 시각적으로 끌어낸다.

호혜의 순간과 은폐된 시간
작업은 언젠가 완료되어 작가의 손길이 멈춘다. 하지만 이 경우에도 장인희 작품이 지닌 시간의 유동성은 멈추지 않는다. 순간들이 재구성된 이후(작업 완료)에도 시간은 상황을 반영하여 수시로 변한다. 그래서 작가의 시간은 늘 과정으로서 존재한다.
그가 가위질로 조형한 순간의 상징적 형상들의 밑바탕에는 새로운 시간의 종합을 끊임없이 산출하는 힘이 내재되어 있다. 다수(many)의 구현체를 하나의 새로운 일자(one)로 종합하려는 에너지가 순간의 형상들 내부에 존재한다. 이것은 작업 재료인 금색이나 연금색(혹은 은색) PET 필름의 특성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강도의 차이가 있으나 반사 시트지나 알루미늄판, 스테인리스 스틸판 등의 재료도 같은 특성을 가진다.) 눈에 띄게 반짝이는, 마주 선 상(像)을 비추는 금빛 반사 필름은 앞에 선 타자를 자신의 표면에 품음으로써 작품의 시간으로 그를 초대한다. 그리고 타자의 모습이 작품에 드리워진 순간, 작품은 타자를 반영한 새로운 시간의 종합을 산출하며 또 다른 시간의 형태로 변모한다. 공간을 점유한 설치 작업도 마찬가지다. 반사에 더하여, 쉽게 휘고, 바람에 휘날릴 정도로 가벼운 필름의 또 다른 특성으로 인하여 타자의 몸짓(감상자의 이동)과 주변 환경의 변화(공간에 이는 바람 등)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움직인다. 그로 인해 시시각각 형태는 변하고 시간은 새롭게 종합된다. 이렇게 타자(및 환경)에 반응하고, 교류하며 관계 맺는 순간은 타자와 함께 호흡하는 호혜의 순간이다. 작가의 시간성은 타자(및 환경)와 상호작용을 거듭하면서 이렇게 멈춤 없이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한다.
최근 장인희는 시간의 은폐성과 내부에 존재하는 시간성을 사유하며, 드러나지 않지만, 내부에 존재하는 시간을 조형하는 실험을 진행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의 이전 작업은 먼저 채색한 시간의 층위(배경) 위에 순간의 형상들을 배열하여 재구성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재구성한 순간의 형상들 위로 색채를 덮고 몇몇 반짝이는 순간의 형상들만 보여주는 형식(혹은 어떤 순간의 형상도 보여주지 않는 형식)을 선보이고 있다. 이것은 시간의 은폐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표현이다. 하지만 반사의 특성을 지닌 몇 개의 순간 형상이 그 모습을 보이거나 색채를 덮었음에도 순간 형상들이 볼록하게 약간 튀어나옴을 통해 우리는 색채 아래에 존재하는 시간의 형태를 어렴풋하게 짐작하게 된다. 이러한 작가의 최근 작업은 시간이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주는 새로운 형식 실험이며, 시간의 층위가 그만큼 복잡하고 다층적임을 알려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볼 수 있다.

장인희가 조형한 시간의 형태는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영화 <컨택트(Arrival)>(2017)에 등장한 외계인 헵타포드가 사용하는 비선형적 시간을 지닌 원형(圓形)의 언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형상이 왜 떠오른 걸까? 시간이 우리의 사유 범주를 넘어서 있음을 알려주는 표증처럼 보여서 일까? 우리는 시간의 수평선 너머를 알 수 없다. 그곳에 접근하기조차 쉽지 않다. 그래도 희망은 있다. 우리는 장인희의 시간 항해술에 의지해서 어쩌면 시간의 수평선 너머까지 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