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Tschang-Yeul
김창열
평론
비온 후의 우주

제라르 바리에르

결코 얽매이는 법이 없는, 그래서 언제나 다시 곧장 떠날 준비가 되어있는 물.
해탈의 이미지, 불교가 도래하기 전까지도 중국인들에겐 물은 의미심장한 존재였다.
물, 그 형체 없음이여. - 앙리 미쇼. ‘중국의 표의문자’ 중에서


물방울

모든 물체의 최소 공통 분모의 하나이면서도,
가볍고, 아무 것도 아닌 것(無).
단지 한 개의 물방울뿐인 것.
그러나……
어떤 완벽함이
이 이상의 비임을 내포할까?
어떤 겸허함이 이 이상의 빛을 싸안을까?
어떤 극소함이 이 이상의 무한을 내포할까?
어떤 무엇이 이보다 더 단순하고,
동시에 더 뚜렷하고
매혹적일 수 있을까?
어떤 무엇이 이보다 더 무진장할까?
이것은 어째서 지난 20년 이상 덧없음의 전형이라 할 물방울이란 이 비물체가, 김창열의 그림에 있어서 유일한 모델이었고, 기본 단위가 되어 왔는가를 추측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다. 그렇지만 그의 작품들이 울리는 다양한 울림들을 좀 더 자세히 음미하려면, 물방울의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 그 밖의 몇 가지 국면들과 동양 사상에서 그것이 점유하는 중요성의 폭을 염두에 두고 가늠해 볼 필요가 있겠다.

영혼의 개별성이나 절대자라는 개념이 거부되는 불교에서조차 물방울과 대양의 이미지를 인용한다. 이는 형태를 띤 공空 즉 색色이 형체 없는 공空과 만나 미동도 없이 광막하기만 한 열반의 세계에 이르름을 표상하기 때문이다. 티벳, 중국, 한국, 일본 등지의 우주관의 모체가 된다 할 인도의 신비론적 우주관에 있어서는 물방울과 정액의 방울이 태초의 한 점 또는 최초의 원자를 뜻하는데, 이는 곧 우주와 또 다른 우주가 거기서 생겨난다는 일루전의 같은 출발점이 된다. 이렇듯 물방울은 우주폭발 생성론에서 중심적 존재이고, 또한 의식과 명상의 분야를 나타내는 만다라에서는 핵심을 이루며, 명상자에게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의 진리, 곧 빛나는 공허의 일관성 속에서 감각세계의 다양성을 직면하게 해준다.

‘이러한 빛나는 한 방울의 물 속에는 헤아릴 수 없는 태양들이 빛을 발하는 무한한 공간이 담겨 있음을 줄리우스 ‘이볼라. 탄트라 요가’ 중에서

또 하나 흥미로운 점은 극동의 불교는 그 초창기부터 뿌리깊은 무속의 전통과 공생해 왔다는 점은데, 그 샤머니즘적인 전통 속에서는 빛을 응결시키는 두 단계에 물방울과 수정의 파편을 사용하고 있다. 이는 곧, 인식이 천리안을 거쳐 혜안에 이르는 단계들인 것이다. 내 고향의 사이비 마술사들조차도, 물방울과 석영의 합성체라 할 수정 구슬을 써서, 그 영적인 홀로그래피가 나타내는 화면 위에 날카로운 시선을 고정시키고 거기 펼쳐지는 가물거리는 투영들에서 삼라만상의 이치를 깨우치고자 해오고 있는 것이다. 김창열의 작품에서 물방울의 상징에 대한 이러한 접근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엄밀히 말해서 이것은 전기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다음의 마지막 사실이 우리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1929년에 한국에서 태어난 작가는 한국전쟁이 발발했을 때 갓 스무 살이었다. 이 전쟁의 끔찍함은 그에게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상흔을 남겨놓았으니, 탱크들에 의해 으깨진 인간의 머리통들, 역전 광장 전선주에 폭탄에 튕겨져서 거꾸로 매달려 검게 그을린 여인의 시체 등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 자신의 증언에 따르면 그의 작품에서 모든 물은 정화나 순화를 위한 기원일 수도 있으며, 헤아릴 수 없이 많고 투명한 이 물방울들은 더 많은 어두운 기억의 방울들을 쫓아내기 위한 액막인 셈이 되는 것이다. 오랫동안 물방울의 유일한 ‘동반자’는 텅 빈 자연색의 캔버스였다. 거기에물방울이 들러붙은 방식이 공간보다도 더욱 감상자의 관심을 혼란시켰다. 왜냐하면 더 이상 흘러내리기를 거부하는 물방울의 집요함과 완강함이 첫번째 충격이었다면. 두번째는 김창열이 조성한 착각의 완성이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의 정물화에서 보여지는 극사極似 기법 중에서도 가장 완벽한 기법으로 묘사된 물방울들과 거기 대비되는, 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드러내놓고 있는 캔버스. 그래서 더욱 더 텅 비어 보이는 공간. 거기 무리진 성운처럼 흩뿌려진 빛나는 물방울들. 이 물방울과 캔버스 두 가지만으로 김창열은 하이퍼 리얼리즘, 추상 예술, 개념 예술 등이 불가피하게 결합되어 있는 화풍을 제시하는 공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캔버스 위에 놓인 물방울 한방울이, 흐르거나 멈춰진 채로 폰타나의 과격한 화면 찢기 수법이 조성한 공간 개념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공간개념을 만들어내고 있다. 네 개의 물방울들이 텅 빈 공간에 빈 네모꼴을 이루면 말레비치가 그의 작품에서 추구하던 넘을 수 없는 지평선의 연구만큼 심오한 세계를 이룩한다. 캔버스 위에 혼란스럽게 흩뿌려져 있는 수천 개의 물방울들은 폴록의 부동의 세계를 생각케 하기도 하고, ‘방울적 흘러내림’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 이 흘러내리다 정지된 물방울들은 무한정하게 유보돼 있는 일종의 명상적인 행위미술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듯 물방울과 캔버스만으로 김창열은 영역개념을 설명하는 수많은 이론과 연출기법과 전략들을 등장시키기에 충분한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는 마치 옛날의 중국 바둑이 그 공간을 어떤 전제로서가 아니라 어떤 효율성이나 성취해야 할 사실로서 규정하듯이, 또 현대에는 양자 물리학이 공간의 한 점을 움직여 전체 변수의 변화를 이끌고, 극소량의 물질과 극소량의 에너지를 교환하는 것과도 같다 하겠다.

캔버스와 물방울일 때에 한해서는, 둘이 이루는 변증법은 두 허공이 엮는 그것이었다. 경계지어지고, 눈부신 보잘 것 없음이, 빛없이 탁 트인 또다른 보잘 것 없음과 이상한 관계를 이루고 있었다. 허공의 형태들이 온갖 형태의 허공, 그 사막처럼 우중충한 평면 위에 쉬고 있었다. 그런 캔버스는 자갈과 모래로 된 동양의 정원에서 느껴질법한 경건한 명상미를 풍긴다. 그것은 그것대로 완성이 달성된 듯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텅 빈 투우장에서 진행되는 승부터럼, 빈 절벽 아래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처럼 수고가 좀 손 쉬운 데가 있지 않았나 싶었다. 그러던 것이 80년대 말부터 그가 펼치는 새 작업에서는 표의문자의 기호가 물방울의 새 호적수가 되어 나타나, 대담하고 가공할 만한 한판의 승부를 펼치게 된다. 비존재의 형체가 이제부터 그 테두리를 이루고 무수히 많은 존재의 명칭들의 형태들이 바탕을 이루게 되었다. 김창열이 물방울과 더불어 뿌려 놓은 이 한자들은 분명히 마구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모두 단일한 중국의 고전시에서 발췌된 것인데, 모든 학동들은 이 시를 갖고 글쓰기와 동시에 세계에 대한 그들의 공부를 시작하는 것이다. 천자문이라고 불리는 이 텍스트는 천 가지 사물들에 대한 시이기도 한데, ‘천 가지 사물들’이란 말로써 중국 철학은 온갖 무한하고 환상적인 다양성 가운데서도 우리의 감각들에 의해 파악된 우주를 지칭한다.

‘도는 하나를 낳고
하나는 둘을 낳는도다.
둘은 셋을 낳고
셋은 천 가지 사물들을 낳는도다.’
- ‘도덕경’ 중에서

이러한 시의 강물 위에, 이러한 대양과도 같은 텍스트 위에, 이러한 거대한 보르헤스적인 백과사전 위에, 현존하는 바로서의 그리고 전개하는 바로서의 우주의 총체성에 대한 이러한 표의적인 재현 위에 김창열은 그의 물방울들의 조롱과 무에 대한 그의 표의문자들을 투사한다.

의미를 지닌 완벽하고도 조심스러운 기호들 위에서 총체적인 진공의 방울이 끓어로른다. 하나의 물방울이 지닌 뚜렷한 단순성은 급작스럽게 천 가지의 사물들을 혼란 속으로 변형시켜 그 사물들에 대한 모든 지식을 흰 소음 속으로 몰아 넣고, 현실성의 최초의 움직임들이 결여된 때아닌 소동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것이 우주와 천체와 위대하고도 무한한 전체가 하나의 물방울 속에 가장 미세한 진공의 방울 속에 빠져드는 과정이다.

무엇이 진행되고 있는가? 거기에 대한 인식은 이제 겨우 우리에게 파고들고 있는데 그것은 여기 목격된 이 현장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바로 대홍수의 재현이라는 사실이다.

김은희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