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경, 최고의 기쁨 서성록 (안동대 미술학과교수) 김미경씨의 그림을 볼 때면 자연의 색깔을 잠시 퍼다 놓은 것같은 착각에 빠진다. 하늘처럼 파랗고 봉숭아꽃만큼이나 빨갛고 투명한 옥색 호수처럼 말갛고 따스한 봄날에 수줍게 핀 이파리처럼 앳된 연둣빛이 감돈다. 색깔로만 이런 기분을 자아낼 수 있게 만들었다니 마냥 신기할 따름이다. 이만하면 ‘유창한 칼라리스트’란 칭찬을 들을 만하다. 색깔은 화가들마다 관점에 따라서 서로 다르게 사용되어왔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칸딘스키는 색깔로 음악적 대위법을, 순례자와 같은 삶을 살았던 고흐는 지상의 존재에 대한 애착을, 표현주의자 프란츠 마르크는 내면의 불안을, 빛의 흐름에 심취하였던 라리오노트가 물리적 광선을 실어냈다면, 김미경은 ‘물댄 동산같은’ 영혼을 실어낸다. 그에게 색깔은 영혼과 심령의 상태를 시추하는 두레박이자 거울같은 매개물이다. 색깔을 매개로 작가는 눈에 보이는 세계 너머, 더 높은 단계의 세계로 이끈다. 내가 그의 작업에 관심을 갖는 것은 그의 작품이 보는 사람을 즐거이 맞아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우중충한 비구름이 걷히고 저만치에 뜬 무지개처럼 색깔들이 함박 웃음을 지으며 감상자를 반긴다. 울적하거나 고단할 때 그의 작품을 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획 달아난다. 그의 작품의 매력은 환희와 기쁨이 우리 자신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데에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을 보면 잠시 딴 세상에 와 있는 기분마저 든다. 눈물과 비탄, 불안과는 대조적으로 찬미가 울려 퍼지고 아름다움으로 눈부신 평화스런 세상 말이다. 그림 속의 가상에 불과하지만 그런 착각에 사로잡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말쑥한 표정 작가는 그간 강렬한 원색의 물결, 거친 호흡의 갈필, 그리고 자연의 아름다움을 화폭에 담아왔다. 떠들썩한 미술계의 시류에 간섭받지 않고 자신의 회화세계만을 확고하게 지켜왔는데 조그마한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강단이 나왔는지 신기하다. 그의 스튜디오를 찾아 근래 관심을 물었더니 “종래에는 큰 풍경을 보았다면 근래에는 작은 것들을 볼 수 있게 되었다”고 이야기한다. 자연을 추상적으로 인식하던데서 하나하나의 존재에 대해 경이감을 갖고 바라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나이를 먹으면서 내 주변에 가까이 있는 것을 더욱 소중하게 여기게 되었다는 뜻이리라. 그렇다. 하나하나의 존재를 가까이 할수록 애정을 갖게 되며 크기와 외모와 상관없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몸으로 체험되는 소중함과 막연히 머릿속으로 중요하겠거니 상상하는 소중함은 엄청난 차이를 갖는다. 몸으로 체험되는 소중함은 김미경씨의 작품에서 보듯이 ‘사랑스러운 존재’로 등장할 수밖에 없다. 그의 작품을 볼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일종의 순화된 정서라고 할 수 있다. 울창한 숲을 보듯이, 아니 그 숲에 들어갔을 때 상큼한 향기를 맛볼 수 있듯이 그런 청아한 감정을 느낄 수 있다. 시름을 잊고 답답한 마음을 풀 수 있으며 한편으로 편안하고도 유쾌한 기분을 갖게 한다. 그의 그림을 보면, 어느 한 구석 소홀한 데가 없다. 공간을 점유하는 색채와 그 주위의 바탕이 잘 어우러져 있을 뿐만 아니라 그 표정도 말쑥하다. 푸릇한 잔디로 곱게 옷 입은 들판 혹은 수줍은 소녀처럼 뺨에 홍조를 띤 가을산을 떠올리게 한다. 주위 공간은 색채를 떠받치고 또 바탕의 색깔은 액체와 같은 색채 덩어리를 어질게 감싸 안는다. 산과 하늘이 하나가 되고 바람과 나무가 하나가 되듯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서로 손을 내밀며 품앗이를 한다. 의도된 것이긴 하나 손끝에서 나오는 자잘한 테크닉을 피하고 공간 전체를 기탄없이 ‘통 크게’ 경영한다. 극도의 자연스러움이 물 속에서 뛰노는 물고기처럼 사각의 공간 안을 유영하고 있다. 이것은 작가가 작위와 무작위를 절묘하게 혼용하는 데서 귀결된 결과로 보인다. 가령 중앙의 색채 덩어리는 무작위적 프로세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의 작업 방식은 독특한 데가 있다. 털펜타인과 혼합된 안료를 캔버스에 올려놓고 손으로 화면의 상하, 좌우로 높낮이를 달리해 조정하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그러면 캔버스 위의 안료는 상하, 좌우의 높낮이에 따라 흘러내리게 되고, 작가는 그 흘러내림과 함께 번지기, 덧붙임을 추가하여 다양한 표정을 얻어낸다. 옅은 물감 사이로 보이는 작은 안료 입자들, 그런가 하면 그 주위를 에워싸는 접착력 있는 리퀴드의 포용력은 쉽게 흉내낼 수 없는 효과를 자아낸다. ‘색에 대한 민감성’은 그의 작품에서 자랑할만한 부분이다. 그의 작업은 미리 형태를 완전히 잡아놓고 진행하는 스타일이 아니다. 대강의 윤곽이 잡히면 색깔을 선정하고 그때 그때의 미적인 감정에 따라 작업을 불쑥 개시한다. 원하는 색을 입히고 그 위에 더 채도높은 색을 올린다. 색을 무덤덤하게 올리는 것같지만 사실은 보자기에 감추인 마음의 빛을 풀어놓는 것과 같다. 그가 전달하려는 것은 가슴 벅찬 순간, 환호를 지를 때의 순간처럼 어떤 것에 크게 감동되었을 때의 마음상태인 것이다. 그렇게 탄생된 촘촘하고 상쾌한 미적인 감정의 결, 그것의 유속은 느리며 속이 훤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하고 시원스럽다. 색의 사용은 아주 우연한 기회에 시작되었다고 한다. 강릉에서 강의를 마치고 돌아오던 중 그는 시골길에서 인상깊은 광경을 목격한다. 파란하늘에 까치밥으로 남겨놓은 분홍색 감을 보고 너무 예쁜 나머지 그 감흥을 못 잊어 색을 본격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의 고운 빛에 그만 연민의 정을 느끼게 된 것이다. 그 이후로 색깔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말았다. 근 20년 간 작가는 색깔과 그것의 변주를 연구해왔다. 색깔이라면 일가견을 지닌 사람이다. 그러던 중 몇 년전부터 재료를 안료(피그먼트)로 바꾸고 털펜타인의 효과를 적극 활용함으로써 지금과 같이 단계에 이르게 되었다. (여전히 외곽은 두툼한 질감효과가 좋은 오일로 착색한다) 김미경씨와 대화를 나누던 중 순도높은 색을 사용하게 된 모종의 계기가 있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아마 근래의 환경변화와 관련이 있지 않겠느냐는 답변이 돌아왔다. 사실 작가는 오랜 서울생활을 마무리짓고 2004년 경기도의 오포로 작업실을 옮겼다. 그의 작업실이 있는 오포는 분당과 인접한 지역이기는 하나 주위는 시골에 가깝다. 무성한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새소리, 각종 들풀들로 우거져 있다. 발걸음을 몇 발자욱만 옮겨도 깊은 산골이 나온다. 작가는 말하기를 작업실 뜨락에서 자라나는 백합화와 대추나무, 매일 대하는 야생화와 무수한 잎새로 치렁치렁한 넝쿨 등을 접촉하면서 그의 작업에도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고 한다. 작가는 회색빛이 감도는 도시를 탈출하면서부터 생기발랄한 자연속에서 제2의 시대를 열어갈 수 있게 된 셈이다. 오포로 옮겨온 후로 작품이 부쩍 젊어졌고 화사해졌다. 앞으로는 또 무슨 작업이 나올지 자신도 부픈 기대감이 든다고 한다. 기쁨의 열매 그의 작품은 설렘과 가슴 벅참, 희열 등 고조된 정서가 터질 듯 잔뜩 부풀어 있다. 그런 감정을 품어본 적이 없다면 이렇게 고감도의 미의식을 이해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김미경씨에게 직접 물어보지는 않았지만 작가는 세상이 창조되고 창조주를 바라보며 기뻐하는 피조물들을 지켜보며 그들의 자태를 온 몸으로 전율하면서 그가 받은 감동을 신속하게 옮겨내지 않았나 싶다. 더 이상은 가능할 것같지 않은 고감도의 색깔, 틀에 갇히지 않은 고아한 모양, 그리고 심플하고도 박력있는 공간구성으로 그 찬란하고도 웅장한 창조계의 신비를 묘출한다. 창조세계를 통해 우리는 ‘신성의 표식’과 ‘영광의 불꽃’을 본다. 그래서 칼빈에 따르면, “우주를 정교하게 지으신 솜씨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바라보도록 하는 일종의 거울이다”고 했다. 작가는 자연물을 단순한 생물조직 혹은 그림의 소재로 파악하는 대신 ‘신성의 공교로움’에 의해 빚어진 ‘살아있는 예술품’으로 파악한다. 이런 사실을 묵상할 때 우리는 적잖은 심적 흥분을 감출 수 없다. 사물을 건성으로 보거나 감흥없이 대하는 것만치 무의미할 때도 없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이 최고의 기쁨을 실어내고 있으며, 최고의 아름다운 노래 가락이 깃들어있다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작가는 아름다운 색깔을 영화로운 ‘신성의 표식’을 삼으려고 했을 수도 있고, 피조된 세계의 장관과 정교함을 보며 자신의 희열을 전달하려고 했을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주어진 것을 가지고 더 깊고 넓은 세계를 생각하는 것은 그가 해맑은 심령의 눈을 지녔다는 표시에 다름 아니다. 선홍빛 숭고함이나 묵직한 정신의 깊이같은 것은 그의 작품에서만 느낄 수 있는 고유한 미적 감정들이다. |
Kim,
Mi Kyoung, Pure Ecstacy |